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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파르타의 역사

by inniable 2023. 8. 6.

목차

스파르타의 역사

신화속의 스파르타

스파르타의 사회

스파르타의 군대

 

스파르타의 역사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중 하나였습니다.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매우 강력하여 인근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코린트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독특한 빨간 망토와 긴 머리를 가진 스파르타 중장보병(호플리네스)은 B.C. C5세기 페르시아 군대와의 주요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쪽에 있는 라코니아의 비옥한 유로타스 계곡에 위치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B.C. 10세기 경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B.C. 8세기 후반에 스파르타는 이웃한 Messenia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리스에서 가장 큰 8,500km²의 영토를 통제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정치의 주요 주체로 올라서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계곡에 정착한 후 그리스 도시중 주요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계곡에 정착한 후 그리스 도시중 주요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정복된 Messenia와 Laconia의 민족은 스파르타에서 정치적 권리가 없었으며 종종 스파르타 군대에 복무했습니다. 

 

스파르트 시민들은 시민들 소유 영지에 헬롯이라는 반노예 농업 노동자를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농업 보다는 군사 훈련, 사냥, 전쟁, 정치에 시간을 바쳤습니다. 반노예였던 헬롯은 그들이 경작한 농산물의 일정 비율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스파르타 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굳건히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숙청을 당했고, 전시에는 징집되어 군사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도시인 아테네 및 코린트와 끊임없이 경쟁하였고, B.C.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코린트 전쟁을 치루는 등 전쟁속에서도 굳건함을 잃지 않았지만, 보수적인 정치와 계속되는 전쟁으로 급격히 시민의 수가 줄어들어 더이상 그리스와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았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무렵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가 도시를 약탈한 서기 396년에 스파르타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신화속의 스파르타

그리스 신화에서 스파르타의 창시자는 제우스의 아들인 라케다이몬으로 도시에 아내의 이름 스파르타를 붙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대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아내 헬레네를 납치한 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헬레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동료 여신 아테나와 헤라와의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파리스에게 선택하라고 하자 아프로디테를 선택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파리스에게 준 여성입니다. (파리스는 명예와 권력 대신에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보상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사회

모든 그리스 사회와 마찬가지로 스파르타는 남성 시민이 지배했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사람들은 선택된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었고, B.C. 6세기 스파르타 지도자인 Lycurgus의 개혁에 따라 시민들은 농업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 노예인 헬롯(Helots)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시민이 될 수 없었으며 스파르타가 약해질 때마다 내부적으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B.C. 5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스파르타의 끊임없는 전쟁은 스파르타 시민의 수를 급격히 줄게 만들었습니다(B.C. 490년 8,000명 B.C. 371년 700명). 

 

스파르타 도시 국가의 여성들은 다른 그리스 도시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가졌습니다. 스파르타 여성들은 종종 지참금과 상속을 통해 얻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 여성들은 남성들이 많은 전쟁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파르타 땅의 2/5를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스파르타 여성도 적당한 자유를 가지고 돌아다닐 수 있었고, 운동(남자처럼 알몸으로 하는 것)을 즐길 수 있었으며, 심지어 와인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자유는 다른 그리스 국가에서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타 사회에는 외국인(제노이)이 있었지만 이들은 다른 도시 국가만큼 환영받지 못했고 스파르타에 살았던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매우 보수적으로 때때로 강제로 외국인을 추방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파르타의 군대

모든 스파르타 시민들에게는 군사 훈련이 의무적으로 부과되었습니다. 더불어 군사 훈련시에는 보리, 치즈, 무화과, 포도주와 같은 간단한 음식만을 제공하였고, 검소한 생활이 강조되었습니다. 7세부터 남성은 아고게(agōgē)로 알려진 군사훈련을 받았고, 연령별로 분리되어 병영에서 살았습니다.

 

20세 이상의 젊은이들에게는 보다 엄격한 운동 및 군사 훈련을 실시했고, syssition(병영)에 합류하여 나이가 많고 경험이 더 많은 시민들과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상대적으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보다 훨씬 정교한 전투 기동을 할 수 있는 전문 장갑보병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고,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인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 시민들은 종교와 전쟁이 겹칠 경우 종종 종교를 더 우선시하고는 했습니다. 전투 전후 희생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전쟁의 공통된 특징이었지만 스파르타의 군대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전쟁전에 희생을 치르고 중요한 종교 축제가 진행되는 경우 군대 동원을 보류하기도 했습니다. 마라톤 전쟁의 경우 스파르타 병사들은 종교행사로 인해 다른 그리스 도시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테르모필레 전쟁의 경우 아폴로를 기리기 위해 Karneia 축제를 먼저 축하해야 하기 때문에 명목상의 군대만 동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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