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사회주의, 포퓰리즘의 창시자 그라키 형제
그라키(Gracchi)형제라고 불리는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BC 2세기 고대 로마에 토지 개혁과 기타 포퓰리즘 법안을 도입하려고 했던 평민 호민관(tribune)이었습니다. 둘 모두 로마 원로원의 보수적인 Optimates에 반대하는 Populares의 회원이었습니다. 이 둘은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로마 정치에서 격동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렸고, 그들의 경력과 죽음은 호민관 제도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나타냅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BC 168년에 태어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그라키(Gracchi) 형제 중 형이었습니다. 그는 토지 개혁을 입법화하려 했으나 상원의원의 손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티베리우스의 개혁안에 따르면 어느 시민도 전쟁 중에 획득한 500유게라(1.26km2) 이상의 공공 토지(ager publicus)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토지 초과분은 주에 편입되어 1가족당 약 30유게라의 작은 토지로 나뉘어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에게 재분배될 예정이었습니다.
상원의원들은 로마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토지가 부의 기초였기 때문에 토지 개혁에 저항했습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상원 의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의 주요 상대는 티베리우스의 법안이 의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또 다른 호민관(tribune)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였습니다.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인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3세가 죽자 그는 전 재산을 로마 사람들에게 남겼습니다. 티베리우스는 페르가몬의 유산을 토지 개혁 법안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상원의원의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대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임기가 끝난 다음 해 호민관으로 재선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임기후 바로 재선되는 전례가 없었고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티베리우스가 폭군이 되려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거 당시 원로원에서는 티베리우스의 추종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티베리우스는 나무 의자에 맞아 죽었으며 그의 지지자 300명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은 로마 공화국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9살 어린 티베리우스의 남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개혁의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BC 126년 28세의 나이에 재무장관이 되었고 BC 123년 32세에 평민 호민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티베리우스보다 더 복잡하고 대립적인 인물로 간주되며, 단순한 토지 개혁을 넘어서는 훨씬 더 명확한 입법 의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법 중 일부는 형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티베리우스 사후 티베리우스 동료들을 처형한 당시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대상으로 하는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은 반드시 민회를 통해야만 가능했는데 포필리우스는 민회가 아니라 특별위원회를 소집한 후 재판을 통해 티베리우스의 동료들을 처형시켰습니다. 민회를 거치지 않은 사형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후 법안을 소급 적용하여 포필리우스를 로마에서 추방시킵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공약이었던 배심원을 기사계급으로 채우는 정책을 실현시킵니다. 티베리우스의 토지 개혁법을 갱신하였고 이탈리아와 카르타고에 새로운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17세 미만 로마인에 대한 징병을 허용하지 않고 국가가 기본 군사 장비 비용을 지불한다는 법을 도입했습니다. 이전에는 로마 군대의 군인이 장비 비용을 스스로 지불해야 했는데, 소득이 가장 낮은 계층에게는 특히 어려운 법이었습니다.
가이우스는 형과 달리 연임에도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가이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같은 원로원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원로원을 배경으로 드루수스는 가이우스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게 되었고, 시민들의 인기는 드루수스에게 집중되며 가이우스는 잊혀지게 됩니다. 가이우스는 세번째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게 되나 낙선하고 맙니다.
이때 가이우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으로 당선됩니다.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 법안을 철회하려고 하였고 군중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모여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때 오피미우스의 부하가 살해당하게 되는데 이를 빌미로 원로원은 최초로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발의합니다. 이 법은 집정관이 누구든지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면 배심원 없이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오피미우스는 병사를 이끌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를 모두 체포합니다. 가이우스는 달아나다 목숨을 끊었으며 지지자 3천명은 모두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후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모든 법안을 폐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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