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로마의 역사
BC 753년 로마 건국 이후 수로를 통한 무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로마는 BC 509년 공화정 도입후 카르타고 등 주변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영토를 확장하고 찬란한 로마 문화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원조격인 로마 공화국 제도는 지배계급인 optimates와 대중 populares간의 정치적 충돌이 계속되었고, BC 1세기경 제1차 3두정치와 제2차 3두정치를 거쳐 제국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목차
초기 로마
테베레 강변의 작은 마을이었던 로마는 BC 753년 건국이후 무역을 통해 규모와 세력을 키웠습니다. 로마의 위치는 상인들의 상품거래를 용이하게 하는 강변에 위치해 무역이 용이했습니다. 초기의 로마는 로물루스에서 타르퀴니우스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이 통치하면서 그 규모와 세력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리스 식민지를 통해 로마에 유입된 그리스 문화는 초기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했습니다. 그리스 문화는 로마인들에게 문학과 종교, 그리고 건축의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북쪽의 에트루리아인들에게서는 무역과 소비 모델을 배웠습니다. 에트루리아 또한 무역을 위한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와 직접 무역을 통하거나, BC 650년에서 600년 사이에 로마 지역을 침략한 에트루리아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에트루리아 문명이 로마 문화와 사회의 발전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초기 단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로마인들은 다른 문화의 기술과 문화을 차용하고 개선하는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는 BC 8세기에서 6세기 사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초기 7명의 왕중에서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가 기원전 509년에 폐위되었을 때, 그의 라이벌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체제를 개혁하고 로마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전쟁과 확장
초기 로마는 무역으로 성장했지만,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은 주변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의 전쟁(BC 264 ~ 146년,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세력을 강화하고 도시 급성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 무역에서 라이벌이었고, 이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하면서 로마는 이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바다에서 로마의 통제를 방해하는 해적들의 침입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로마 공화국의 명성과 세력이 커질 수록 부패, 탐욕, 외국인 노예 노동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조금씩 고통받기 시작했습니다. 정복을 통해 유입된 노예들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로마인들은 부유한 상원의원들에게 폭력을 제공하였고, 부유한 엘리트인 귀족들은 하층 계급인 평민을 희생시키면서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BC 2세기에 로마의 호민관인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농지 개혁과 정치 개혁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두 형제가 모두 이 개혁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입법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로마에 만연한 부패가 축소되었습니다. 제1차 삼두정치 때까지 로마 공화국은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공화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계급에 따라 분열되어 갑니다. 지배계급은 스스로를 optimates(최고의 남자)라고 불렀고, 하층계급은 populares(인민)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름은 정치적 이념으로 변합니다. 모든 지배계급이 optimates도 아니었고 모든 하층계급이 populares도 아니었습니다.
optimates들은 로마 원로원의 권력과 지배계급의 위신과 우월성을 선호하는 전통적인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지켰습니다. populares는 로마 공화국의 개혁과 민주화를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반대되는 이데올로기는 공화국의 종말을 가져올 세 사람으로 대변되어 충돌하게 됩니다.
처음에 세 사람은 야망이 가지고 권력을 놓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로마를 번영시켰습니다.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둘 다 각자 정복을 통해 로마를 부유하게 만든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크라수스는 대중들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존경을 보내는 것 처럼 크라수스 역시 군사적으로도 존경받기를 갈망했습니다. BC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상대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었지만, 카레 전투에서 패했고,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사망했습니다.
크라수스가 사라지자 제1차 3두정치는 붕괴되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법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로마 상원 의회는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돌아가 다양한 혐의로 재판을 받도록 명했지만, 카이사르는 BC 49년에 그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의회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고 라이벌인 폼페이우스를 제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BC 48년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그곳에서 수적으로 열등한 카이사르의 군대가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하여 피난처를 찾았지만 도착하자마자 암살당했습니다. 파르살루스에서 압도적인 숫자에 맞서 카이사르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폼페이우스의 옛 친구이자 동맹이었던 많은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신들의 총애를 받았다고 믿으며 재빨리 카이사르의 편에 섰습니다.
제국을 향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제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상원이 자신을 dictator(독재자)로 선포하게 하였고 공화국 시대를 끝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엄청났으며 강력하고 안정적인 중앙 정부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로마의 번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업적 때문에 BC 44년에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됩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카이사르가 너무 강력해져서 결국 원로원을 폐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자 사촌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마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옥타비아누스) 와 카이사르의 친구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힘을 합쳐 BC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제2차 3두정치를 펼칩니다. 이들도 제1차 3두정치 3명과 똑같이 야심가였습니다. 레피두스는 가장 먼저 제거되었고, 남은 2명이 옥타비아누스는 서쪽의 로마 땅과 동쪽의 안토니우스를 통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연루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유지하려고 했던 균형이 깨졌고 두 사람은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했고 둘 다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로마의 유일한 권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BC 27년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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