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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1차 포에니전쟁

by inniable 2023. 8. 29.

제1차 포에니전쟁

BC 264년부터 BC 241년까지 23년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전쟁을 제1차 포에니전쟁이라고 합니다. 시칠리아의 폭동과 지배권 다툼이 제1차 포에니전쟁의 원인입니다. 시칠리아는 로마와 매우 가까이에 있는 섬으로 섬 전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게 되면 로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지중해의 두 강국은 부딪히게 되어 제1차 포에니전쟁이 발발 합니다. 이 전까지 해전의 경험이 없던 로마는 제1차 포에니전쟁을 계기로 함대를 운용하고 해전의 승리도 경험하게 됩니다. 23년간의 제1차 포에니전쟁(Punic War)은 두 나라 모두에게 재정악화를 가져왔지만 최종적으로 패배한 카르타고에게 더 뼈 아픈 결과를 안기게 됩니다. 제1차 포에니전쟁 전까지만 해도 지중해 서쪽의 절대자였던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전쟁의 패배로 막대한 보상금과 함께 시칠리아섬 전체를 빼앗깁니다.

 

목차

제1차 포에니전쟁의 원인

로마, 바다에서 승리하다

카르타고의 반격

다시 시칠리아에서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

로마 승리

 

제1차 포에니전쟁의 원인

제1차 포에니전쟁 전 로마가 테베레 강변의 작은 무역 도시에서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는 동안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의 지배자였습니다. 시칠리아섬의 상당 부분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고 부분적으로는 독립된 나라였습니다. 당시 시칠리아의 메세나는 라틴계 마메르타니인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고, 그리스계 메세나인들이 라틴계 마메르타니인들에게 살해 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시칠리아 도시들은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메세나를 공격하였습니니다. 이에 메시나의 마메르타니인들은 카르타고와 로마에 동시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메세나에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 로마에도 같은 도움 요청을 한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껴 시라쿠사에 병력을 파견합니다. 로마는 시칠리아 전역이 카르타고 세력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병력을 메세나에 파견합니다. BC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격돌하게 됩니다. 제1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메르타니인은 로마와 강력한 동맹 맺었고, 로마의 도움으로 카르타고 수비대를 제거했습니다. 로마는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Appius Claudius Caudex)와 2개 군단을 시칠리아로 보냈고 카르타고는 먼저 메사나에서 쫓겨난 수비대 사령관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아크라가스(아그리겐토) 및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카르타고 함대는 시라쿠사와 힘을 합쳐 메세나를 포위하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로마군을 상륙 차단하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카르타고 사령관 한노(Hanno)는 그의 함대가 로마인들이 바다에서 손을 씻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로마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카르타고의 경고에 당시 메사나에 있던 로마 영사는 평화 협정을 제안했지만 한노(Hanno)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한노(Hanno)는 클라우디우스와 16,000명의 로마 군대 상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의 상륙 시도로 로마군은 하룻밤 사이에 메사나에 도착하여 카르타고의 포위를 무너뜨렸고 카르타고 군대와 시라쿠사 군대를 모두 격파했습니다.

새로운 로마 사령관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어 시라쿠사를 공격했습니다. 시라쿠사는 카르타고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항복했고 로마의 동맹이 되었습니다. 동맹국을 잃었지만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지배를 포기 하지 않았고, 로마 군대의 절반이 이탈리아로 철수한 BC 262년에 또 다른 군대를 시칠리아로 보냈습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계속됩니다.

 

로마, 바다에서 승리하다

로마인들은 BC 262년에 집정관 L.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L. Postumius Megellus)와 Q. 마밀리우스 비툴루스(Q. Mamilius Vitulus)가 이끄는 4개 군단으로 아크라가스를 포위했고 카르타고와 아크라가스 동맹을 격파했습니다. 로마는 아크라가스 주민 50,000명을 노예로 삼았고 약탈을 진행했습니다.

BC 261년 로마는 시칠리아 전체를 통제하려면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해상에서 적의 지속적인 증원을 막을 수 있는 해군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BC 260년 봄, 로마는 20척의 삼단노선(갤리선)과 100척의 5인조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60일 만에 건조하게 됩니다.

로마인들은 이전까지 해전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포획했던 카르타고 선박을 개조하고, 선박이 건조되는 동안 육지의 벤치에서 노잡이를 훈련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기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은 제1차 포에니전쟁 동안 해군 함선인 갤리선의 기존 디자인에 혁신을 추가했습니다. 갤리선에 거대한 고정 스파이크가 있는 회전 플랫폼인 corvus(raven)를 적용한 것입니다. 이 다리는 길이가 11미터였으며 중보병 부대 약 80 ~ 120명이 올라 탈 수 있으며 적함 위로 내려지며 고정시킵니다.

Corvus는 카르타고의 상대적으로 우월한 항해 기술을 무효화시켰고, 해상 전투를 로마인에게 친숙한 육상 전투처럼 만들었습니다. 이 발명은 성공적이었으며 두일리우스(Duilius)가 지휘하는 145척의 함대가 BC 260년 Mylae(Milazzo) 전투에서 130척의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했고, 두일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해전에서 승전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로마는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를 습격했고, BC 258년에 술키스 해전에서 또 승리했습니다. 카르타고는 패전의 결과로 그들의 사령관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BC 256년에 330척의 대규모 로마 함대가 에크노무스(리카타) 전투에서 또 다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corvus를 사용한 전술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로마는 마르쿠스 레굴루스 아틸리우스(Marcus Regulus Atilius)가 4개 군단으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카르타고의 아스피스에 상륙했습니다. 이제 제1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 땅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카르타고의 반격

카르타고의 땅 아스피스에 도착하자 마자 로마는 군대와 함대의 절반을 철수합니다. 사령관 레굴루스에게 남은 병력은 약 15,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이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겨울이 지난후에 카르타고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2개의 군단을 로마로 철수시켰을 것입니다.

어쨌든 레굴루스는 이 병력을 운용하여 튀니스 남부 지상전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곳에서 카르타고는 세 명의 사령관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험난한 지형으로 인해 전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습니다. 레굴루스는 도시를 점령했고 BC 255년 양측 사이에 평화 회담이 성사되었지만,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레굴루스의 과도한 요구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출신 사령관 크산티포스(Xanthippus)를 중심으로 군대를 재편성하였고, 보병 12,000명과 기병 4,000명으로 로마군과 맞설 준비를 하였습니다. 크산티포스는 기병대와 100마리의 코끼리를 훌륭하게 활용하여 로마군을 완전히 격파하였습니다. 로마 사령관 레굴루스를 사로잡았고, 12,000명의 로마 군대는 살해당했습니다.

패잔병 약 2,000명은 가까스로 도망쳐 클루페아에 새로 파견된 로마 함대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폭풍으로 인해 대부분의 함선과 함께 익사하였습니다. 이 당시 익사한 병사의 수는 약 10만명에 달합니다(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이를 역사상 가장 큰 해군 재난으로 묘사했습니다).

 

다시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점령에 실패한 로마인들은 BC 254년 파노르무스(팔레르모)를 점령하면서 시칠리아로 돌아왔습니다. 파노르무스 70,000명의 인구 중 200드라크마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BC 253년 로마는 또다시 폭풍으로 약 150척의 함선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습니다. 악천후로 인한 침몰의 원인에 corvus가 부분적으로 책임있을 수도 있다고 역사가들은 판단합니다. 어쨌든 이 corvus는 이 재난 이후 역사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카르타고는 BC 251년에 또 다른 군대를 파견하고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공격합니다. 이때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참호와 투창을 이용해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시키자 메탈루스의 로마군은 성밖으로 나가 카르타고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로마군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코끼리는 이 때 대부분 죽이고 포획하여 로마군의 코끼리 공포는 완화되었습니다.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BC 249년 카르타고 함대가 트라파니에서 로마 함대를 격파, 120척의 로마 함선 중 93척을 나포했습니다. 당시 로마군 영사인 P. 클라우디우스 풀케르(P. Claudius Pulcher)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벌금을 내어야만 했습니다.

장기간의 제1차 포에니전쟁으로 로마나 카르타고 모두 재정이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카르타고는 BC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 한니발의 아버지)를 사령관으로 파견합니다. 하밀카르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게릴라 전술로 로마를 괴롭혔지만 적극적으로 로마로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로마 승리

결국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BC 242년 로마인들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Gaius Lutatius Catulus) 영사의 지휘 하에 부유층 시민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200척의 새로운 함대를 구축합니다. BC 241년 3월 10일, 로마함대는 트라파니에서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했습니다. 카르타고 선박 50척이 침몰했고, 70척이 포획되었으며 10,000명의 포로가 잡히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큰 손실은 아니었지만 수십 년 간의 전쟁으로 자금이 부족했던 카르타고는 결국 강화를 맺게됩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해야 했고, 10년 동안 전쟁 배상금으로 은 3,200달란트를 로마에 지불해야 했습니다.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외국 속주(프로빈시아)가 되었고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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