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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테르모필레 전투

by inniable 2023. 8. 5.

목차

테르모필레 전투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

테르모필레의 지형과 양국의 전력

궁수와 중장보병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테르모필레 전투

테르모필레(Thermopylae) 전투는 고대 그리스의 바다 근처에 있는 산길로 기원전 480년 8월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의 전투로 영화 300의 배경이 된 전투입니다. 수적으로는 매우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소수의 스파르타인 그리고 다른 그리스 보병들과 함께 최후의 방어전을 벌이는 가운데 3일 동안 좁은 고개를 지켰습니다. 결국 페르시아인들이 고개를 장악하긴 했지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영웅적인 모습은 그리스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1년뒤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떠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

기원전 5세기 초,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의 통치 하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은 유럽 본토로 계속 확장하고 있었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예속시켰습니다. 다음은 아테네와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이었습니다. 정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는 사절을 보내 그리스인의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일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에 복종하기로 하였지만, 이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절단을 처형하고 페르시아에 복종하지 않기로 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습니다.

 

다리우스는 600척의 배와 25,000명의 병력으로 그리스를 침공했고, 기원전 490년 아테네가 이끄는 그리스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는 신화적인 지위와 많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가 죽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6 ~ 465년)가 왕이 되었고 그리스 침공 준비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장비와 보급품 창고가 놓여 있었고, 할키디케에 운하를 파고, 군대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헬레스폰트를 가로지르는 보트 다리가 건설되었습니다. 그리스는 사상 최대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고, 델포이의 신탁조차도 아테네인들에게 세상 끝까지 날아가라는 불길한 신탁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테르모필레의 지형과 양국의 전력

침략 소식이 그리스에 전해졌을 때 그리스의 초기 전략은 10,000명의 중장보병을 올림포스 산 근처 템페 계곡에 주둔하는 것이었지만,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라는 것이 드러나자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고, 많은 논의와 타협 끝에 6,000명에서 7,000명 사이의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를 방어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스군은 300명의 스파르타인과 헬롯, 아르카디아인 2,120명, 로크리인 1,000명, 포키인 1,000명, 테스피인 700명, 코린트인 400명, 테베인 400명, 플레이오스인 200명, 미케네인 8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지상군 외에도 그리스는 테르모필레에서 40해리 떨어진 에우보이아 북부 해안의 아르테미시온(Artemision)에 위치를 잡은 함대를 보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삼단노선 300척 이상을 모았고 그들의 주요 전략은 페르시아 함대가 로크리스와 보이오티아의 내륙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테르모필레 고개는 해안을 따라 좁은 늪지대만 남기고 바다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이 있어 방어에 탁월한 지형이었습니다. 고개는 왼쪽의 절벽과 오른쪽 바다위 절벽 사이의 15미터 너비의 길목에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군에 대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80,000명의 군대를 이끄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인들이 공포에 질려 달아날 것을 기대하며 4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리스군이 자리를 잡았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이 무기를 내려놓기만 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항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테르모필레의 위치 및 당시 이동 경로

 

궁수와 중장보병

페르시아군은 궁수를 사용한 장거리 공격을 선호하고 이후 기병 돌격으로 적을 상대하는 반면 그리스인은 팔랑크스라고 하는 밀집된 대형으로 배치된 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를 사용한 전술을 선호했습니다. 호플리테스는 무거운 둥근 청동 방패를 들고 창과 칼을 사용하여 근접전을 벌였습니다.

 

페르시아 보병은 가벼운 방패를 휴대하고 긴 단검이나 전투도끼, 단창, 합성궁으로 무장했고, 10,000명의 정예 부대인 Immortals은 일반 보병보다 훨씬 좋은 무장을 했습니다. 페르시아 기병은 활과 던지고 찌르기 위한 두 개의 창을 추가로 갖추었습니다. 전투시 전장의 측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기병은 궁수가 일제 사격을 한 후 혼란에 빠진 상대 보병을 소탕하는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테르모필레(Thermopylae)의 지형은 이러한 양 국의 전술을 비교했을 때 그리스인들에게 훨씬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막대한 수의 화살을 적에게 빠르게 발사하는 페르시아의 전술은 분명 엄청난 광경이었겠지만 화살의 가벼움은 청동 갑옷을 입은 그리스 중장보병에 거의 효과가 없습니다.

 

 

전투

첫째날 크세르크세스는 일반보병과 기병을 보냈고 좁은 골목을 막은 그리스 군대를 이기지 못하자 정예인 Immortals까지 전투에 참가시켰습니다. 하지만, 첫째날의 그리스 병사들은 굳건했습니다. 둘째 날도 첫째 날의 패턴대로 전투에 임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배신자가 등장합니다. 크세르크세스에게 보상을 받으려는 트라키스 출신 목동 에우뤼데모스의 아들 에피알테스는 페르시아인들에게 남쪽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대체 경로인 아노파이아 경로를 알려주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이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포키아 부대 1,000명을 주둔시켰지만, Immortals 부대가 공격해 왔을 때 방어선을 더 높은 곳으로 물렸습니다. 레오니다스는 일부 병력을 후퇴시켰고, 스파르타인 300명과 700명의 테스피아인 그리고 400명의 테베인으로 최후까지 싸우고자 합니다. 페르시아의 군대의 우회로 남아있던 그리스군의 앞뒤가 포위된 상황으로 레오니다스는 최후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페르시아 군대는 바다인 아르테미시온(Artemision)에서 해안의 폭풍으로 인해 400척의 배를 잃어버렸고, 두 번째 폭풍으로 더 많은 배를 잃어버려 육지에서의 전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당시 해상에서 접전은 없었으며, 레오니다스의 패배소식이 전해지자 그리스 해군은 Salamis로 철수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그리스의 입장에서는 영광스러운 패배라 하더라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본토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린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저항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에 굴복하였고, 아테네도 약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군대는 코린스(Corinth) 근처에 방어벽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겨울이 와서 잠시 전투는 중단되었고, 살라미스에서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군을 얕은 바다로 이동시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갔고, 마르도니우스(Mardonius)장군에게 전쟁의 권한을 넘겼습니다. 잠시 정치적인 협상이 있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한 두 나라는 기원전 479년 8월에 플라타이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중장 보병 부대를 배치한 그리스인들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정복 야망을 끝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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