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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금과 인간의 역사 06

by inniable 2023. 6. 21.

소금과 인간의 역사 06

한반도의 천일염은 아픈 역사중의 하나입니다. 일본제국은 한국의 노동력을 수탈해서 소금을 생산했고, 일제가 조성한 당시 한반도의 염전은 18,270,000평이었습니다. 염전에서라도 살기 위해서 나라를 빼앗긴 불쌍한 노동자들의 희생이 수반되었습니다. 나라를 다시 찾은 후에도 전통적인 소금 채취방식은 자염은 산림보호를 위해 아예 없어져 버렸고, 한반도에서 소금은 오로지 천일염으로만 생산되고 있습니다. 

 

한반도 천일염의 역사


한반도에서 천일염이 도입되기 이전 대부분의 소금은 자염(煮鹽) 또는 화염(火鹽)을 통해 얻었습니다. 자염은 구웠다라는 의미이고, 화염은 불을 때서 얻는다라는 의미입니다. 화렴이라는 곁말도 있습니다. 갯벌 흙을 일구어 만든다는 뜻에서 토염(土鹽)이라고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달일 전(煎), 볶을 오(熬)를 사용하여 전오염(煎熬鹽)이라 했습니다. 어쨌든 사람의 힘으로 바닷물을 모아서 불을 통해 소금 결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천일염이 도입된 것은 일제시대입니다. 화학공업에 막대한 소금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1895년 대만을 정복하고, 대만에서 천일염 제법을 배우게 됩니다. 1905년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일제는 한반도에 천일염전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기획과 당시 대한제국의 재무 부서인 탁지부의 호응으로 1907년 인천 주안과 부산 용호동에서 천일염에 대한 시험이 이루어졌습니다. 1908년에는 평안도 광량만으로 천일염전이 확대됐습니다. 1907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가 한반도에 조성한 천일염전의 면적은 역 6,090정보(1정보 = 3,000평)에 달합니다.

 

소금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입니다. 110년 전 그때, 막 생긴 천일염전에서 염부를 하려는 조선인은 없었습니다. 염부의 일이란, 당시 조선인이 보기에는 소금만 굽다가 죽는 불쌍한 사람, 노비, 군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는 수군의 일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일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산동에서 수천 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수입해와야 했습니다. 이들이 기반을 닦고 나서야 조선인 노동자들이 천일염전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형 염전의 소유자였던 탁지부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폭발했고 쟁의를 시작했습니다. 1910년 4월 평안도 광량만 염전에서 일하던 중국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같은해 6월에는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편을 갈라 투석전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1910년 6월 20일 854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배를 타고 다시 고향 산동으로 돌아갔다.

 

1920년대의 천일염전은 조선인 노동자의 차지가 됐습니다. 토자 없는 농민, 광산보다 싼 일당이라도 받으려는 사람들이 천일염전에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료가 필요했고, 국가는 연료를 지급하지 않고 해수를 굽게 했습니다. 연료 조달을 노동자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소금 노동자들은 늘 연료가 부족해 남의 산에 들어갔다가 산주한테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고, 국유림에 들어가 나무를 채취하다 고을 원님이 잡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궁핍한 환경으로 싸구려 노동력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연료 또한 들지 않는 천일염은 어느새 자염을 밀어내고 한반도를 석권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산림 훼손을 막기 위해 자염 생산에 막았습니다. 1960년 염업 임시조치법을 통해 그나마 남아있던 자염 생산을 아예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의 소금은 천일염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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