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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금과 인간의 역사 04

by inniable 2023. 6. 20.

소금과 인간의 역사

15세기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의 척박한 토지에 정착하게 됩니다. 당시 절인 청어에 사용되는 소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의 중개무역을 통해 발트해 지역에 소금을 독점 공급하던 한자동맹 무역공급망을 도태시키고 유대인들은 다시 번영하게 됩니다.

 

절인 청어 염장법의 발명


중세 유럽인들은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절인 생선과 돼지고기를 선호하였습니다. 하지만 귀한 소금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선을 그냥 햇빛에 말려 저장했고, 아껴 먹었습니다. 이들에게 말린 청어와 말린 대구는 식품이며 화폐였습니다. 청어나 대구를 동일한 크기와 모양으로 말린 후 곡식과 옷, 도구 등 물물교환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STOCK FISH라고 불렀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청어를 와인에 담가 저장하기도 했고, 말려서 훈제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겨우살이 음식들을 준비했습니다.

 

생선의 염장은 11~12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청어, 고등어, 연어, 농어, 뱀장어, 대구 등을 소금에 절였습니다. 그 중 청어와 고등어는 매우 우수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습니다.

 

14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는 청어의 내장을 한 칼에 베어서 제거할 수 있는 생선처리용 칼을 발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칼을 이용해 배위에서 한 칼에 청어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제거한 다음 바로 소금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염장법을 발명했습니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즉시 소금에 한번 절인 후, 육지에서 한 번 더 절이면, 1년 넘게 생선을 보관할 수 있었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선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방식으로 소금에 절여진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습니다. 유럽 각 지역에서 온 상인들은 소금에 절인 청어를 사서 유럽 전역으로 보내며 돈을 벌었습니다. 이 절인 청어를 저장하고 수출하는 데 필수적인 소금은 대부분은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광산에서 생산되었던 것으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왔습니다.

 

유대인과 절인청어


1492년 알람브라 칙령으로 인해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던 유대인들은 지금의 벨기에 저지대와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지역은 종교의 자유를 제외하고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주변국 지형에 비해 저지대에 형성된 지형으로 인해 홍수가 자주 발생하여 농업이 어려웠습니다. 청어 잡이와 염료산업이 있기는 했으나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생산물이 없는 빈국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상업을 키워 나가는 데는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더욱 중계무역에 주목하게 됩니다. 추방되기 전까지 살았던 스페인의 북부 바스크인들은 대구를 소금에 절여서 먹었습니다. 이 절인 대구를 바칼라우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스페인 북부 해안에는 천일염 염전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절인 청어에 필요한 대량의 소금이었습니다.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암염은 비쌌고, 유대인들은 이점에 착안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을 수입 했습니다. 당연히 천일염은 암염보다 값이 쌌고,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은 품질도 좋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절인 청어의 소금을 암염에서 천일염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천일염의 정제


유대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갔습니다. 천일염을 한번 더 정제할 생각을 했습니다. 천일염은 한자동맹이 공급했던 암염보다 가격도 싸고 품질도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시 정제하여 더욱 품질 좋은 소금으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당시 소비자들은 소금의 순도, 모양, 빛깔 등 소금의 질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귀족들이 먹는 양질의 음식에 쓰일 소금은 더 깐깐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고객의 요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소금 정제산업이 유대인들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서양 연안의 천일염을 더 작은 결정의 염도가 높은 소금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이를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의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중반에는 4백개 이상의 대서양 연안 소금정제소에서 4만 톤 이상의 소금을 생산했습니다. 당시 베네룩스 3국 소금 수요량의 50%에 해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제소금은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암염보다 훨씬 쌌고, 이를 통해 발트해 지역이 북해를 제치고 소금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유대인의 소금무역, 한자동맹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다.


소금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은 역사에서 도태되게 됩니다.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암염 대신에 유대인들은 양질의 바다소금을 정제한 후 대량으로 들여와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입니다.

 

당시 한자동맹이 도태된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였고 현지 화폐로만 상품을 매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차액은 항상 현금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인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소금의 독점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막힌 그들은 도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금 유통을 장악한 유태인 들은 독과점 체제를 이루었고, 다양한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 하는 중개무역을 키워 나갔습니다. 스페인에서 쫓겨나 정착한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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