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인간의 역사
소금은 우리몸에 필요한 필수 미네랄입니다. 필수적으로 하루 1g 이상 섭취하여야 하고, 현재 식습관으로는 하루 5~10g의 소금을 섭취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요즘 당연하게 먹고 있는 이 소금에 대해 불과 1~200년 전까지만 해도 염세라는 이름으로 권력자들은 세금을 부과했었습니다.
소금의 섭취
고대의 인류는 하루 1g 정도의 소금 섭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수렵을 통해서는 자연스럽게 소금을 보충할 수 있었지만, 인류가 농사를 통해 곡물 위주의 식습관을 갖게 되면서 소금이 부족해지자 소금의 상품화가 이루어졌고, 하루 5g 이상 의 섭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소금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목적은 식품의 방부입니다. 전시대를 통틀어 15세기 무렵의 스웨덴은 소금섭취를 가장 많이 하였습니다. 계산에 따르면 당시에는 1인당 소금섭취가 100g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원인이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냉장고의 발명이 1일 소금 섭취량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재는 소금을 하루에 5 ~ 10g 정도 섭취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통상적으로 미네랄이 필요량의 3 ~ 5배를 넘어서면 독성이 나타나게 되지만 소금은 다른 미네랄에 비해 관대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소금과 세금
고대 국가의 입장에서 염세(鹽裞, 소금에 부과하는 세금)만큼 과세에 적합한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소금을 원하는 반면 소금의 대체제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누구라도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금은 출처를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숨어서 만들기도 어렵고, 한번 만들게 되면 대량으로 생산되기에 부피가 커서 감추기도 어렵습니다. 소금의 수송은 국가의 입장에서 쉽게 규제할 수 있었고, 과세할 수 있었습니다.
BC 2000년, 중국의 황제 하우(하나라 시조 우)가 황실의 소금은 산동지방의 소금으로 사용하라는 명 이래, 소금은 중국에서 통행세, 관세, 세금의 형태로 오랫동안 중국 정부의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BC 323년,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시리아와 이집트의 관리들은 그리스가 받던 염세를 자국민들에게 계속 징수했습니다. 이 염세가 역사를 거치면서 국가대신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세율을 올리고 특별세를 추가하며, 면세품을 파는 형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로마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테베레 강 인근의 오스티아 제염소는 로마 제국 건국 당시부터 로마 제국이 차지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소금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금에 세금을 부과할 때 벌어들이는 수입은 세리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결국 로마 세리들은 시민들에게 염세를 부과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팽창과 함께 소금 독점은 점점 심해졌고 염세도 끊임없이 올라습니다. 로마의 세리들은 총독의 감독만 받을 뿐 특별한 규제가 없어 독립적으로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제염소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싼 가격을 주고 소금을 구입했는데, 운송비와 각 운송 단계마다 부과된 관세,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소금 광산이나 바닷가 제염소에서 생산된 소금을 나르는 선박 및 수레에 통행세를 부과하는 형태로 염세를 부과했습니다. 이중에서 프랑스의 가벨(gabelle)로 불린 염세는 매우 악랄하기로 유명했고 압제적이었으며, 극도의 조세 저항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가벨의 기원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259년 프로방스 지방의 앙주 공국 샤를이 가벨을 부과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13세기 후반 상비군 유지를 위해 포도주, 밀, 소금 같은 일용 식품에 가벨을 부과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5세기에 가벨은 프랑스의 주요 국세 중 하나이자 염세를 의미하는 세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벨은 단순한 세금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정한 가격으로 모든 남성, 여성, 8세 이상의 어린이들이 의무적으로 매주 한 번씩 소금을 사야 하는 제도였습니다. 왕은 마음대로 가벨의 세율과 할당량을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가벨의 의도는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과세를 한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지역에 따른 과세차별이 발생하였습니다.
대서양 연안의 제염소에서 소금을 공급받는 지역은 그랑드 가벨(grande gabelle), 지중해 연안 제염소에서 소금을 공급받는 지역들은 프티 가벨이 부과되었는데, 그랑드 가벨의 세율은 프티 가벨의 2배 였습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 지역이나 조약을 맺은 지역들은 가벨이 면제되거나 일부만을 내기도 했습니다. 브르타뉴 지역은 가벨이 면제되기도 했고 노르망디 지역은 가벨의 세율이 낮게 책정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심했을 때 그랑드 가벨 과세 지역의 경우 원가의 20배가 넘는 세금이 책정되기도 했습니다.
염세 징수관은 국민들이 의무 소비량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1인당 소금 사용량을 점검했습니다. 소금을 밀수하다가 염세 징수관에게 적발되면 매우 심한 형벌(밀수로 적발되면 일반적으로 갤리선의 노예로 보내지게 됩니다)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염세 때문에 소금 밀수가 성행했습니다.
가벨로 인해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사람들은 농부들과 도시의 가난한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줄여 달라고 왕에게 탄원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가벨을 프랑스혁명의 주요 원인의 하나로 보고있습니다. 1790년 혁명이 최고조에 달하자 프랑스의 가벨은 폐지되었고, 30명이 넘는 가벨 징수관들은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벨 폐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05년 나폴레옹은 다시 가벨을 도입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야 마침내 폐지되었습니다.
비단 프랑스만 이러한 염세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연안, 포스만 주변은 염세가 부과되기 몇백년전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기온도 낮고 습도가 높아 태양에 의한 자연 증발로는 소금을 생산할 수 없었고, 거대한 용기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했습니다.
1700년대, 스코틀랜드에서는 석탄을 태우는 제염소가 150개 이상 생겼습니다.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소금 산업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기에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할 때 맺은 조약 제8조에서 스코틀랜드에게 부과하는 염세를 7년간 면제하도록 하고, 이후의 염세에 대해서도 낮은 세율을 부과한다는 것을 보장하도록 정했습니다.
1825년, 영국은 세계 최초로 염세를 폐지하였습니다. 폐지의 원인은 산업혁명 때문입니다. 산업 혁명은 기계 혁명(증기기관 개발, 직기의 씨실 넣는 장치, 방적기, 수력방적기, 동력직기 등)으로 알고 있지만, 한편으으로는 화학 혁명이기도 합니다. 섬유, 염색, 비누, 유리, 요업, 철강, 무두질, 제지, 양조 등에 대한 수요로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여기에 소금은 방부제나 조미료로서의 역할보다 화학 물질 제조의 시작 물질으로 그 중요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산업혁명 당시의 제조업자들과 공장 소유주들은 영국 정부에 염세를 철회하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소금이 산업 번영의 핵심 원료라고 인식하게 되었고,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절실히 원했던 염세를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본토의 염세는 폐지하였지만, 식민지의 염세는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 부과한 염세에 대해 반대운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염세는 식민압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인도에 대해 영국이 부과한 염세는 세금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소금 공급의 통제는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의미했습니다. 영국령 인도 정부의 인허가 없는 소금 생산이나 판매는 불법이었고, 자연 증발로 생성된 소금을 채취하는 것조차 불법이었습니다.
소금은 영국이 지정한 가격으로 거래해야만 했고, 영국 정부가 지정한 상인을 통해서만 구입해야 했습니다. 인도 사람의 식단은 주로 채식이었고, 날씨가 무더워 땀으로 인한 인체의 소금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인도 사람에게 소금 섭취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식민 통치를 받게 되면서 거의 공짜로 채취하거나 생산하던 소금을 사먹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영국이 본토에 부과한 염세를 폐지한 지 거의 백년이 지난 1923년에도 인도에 부과되는 염세는 오히려 2배나 올라있었습니다.
1930년 3월, 간디와 소수의 지지자들이 인도 북서쪽의 작은 해안 마을 단디로 향하는 380Km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천명의 사람들이 간디의 행진에 동참하였고 단디에 도착하자 해변가 바위의 소금을 긁어 모았고, 바닷물을 끓여서 나온 소금을 팔기도 했습니다.
이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운동에 추가로 동참했습니다. 경찰들은 이 소금들을 번번이 몰수했고, 간디의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벌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해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이듬해 3월 가혹한 염세법은 개정되었습니다. 자기 마을에서 소금을 채취하거나 만드는 것이 허용되었고, 같은 마을 내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것도 허용되었습니다.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소금은 여전히 세금을 내야했지만, 영국 정부의 소금 독점은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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