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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블리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by inniable 2023. 4. 18.

노블리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이회영(李會榮, 1867년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입니다. 거부였던 이회영 가문은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집안입니다. 일제와 친일세력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 6형제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은 뒤 가족 60여 명과 함께 망명했는데, 독립군 양성소였던 신흥무관학교도 이를 기반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아픈 역사속의 우당의 삶과 교훈에 대해 간단히 적어보겠습니다.

 

1. 우당의 삶

1) 유년시절

1867년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동래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인 시영과 여동생 2명이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소영, 호영이 있었습니다. 바로 밑의 동생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소년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으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 행보를 보였습니다.

 

2) 개화, 개몽운동

고종 32년(1896년) 항일 의병 자금조달을 위해 경기도 개성부 인근의 풍덕 지방에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수익금으로 의병 자금을 후원하였습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고, 여성의 재가를 꺼리는 당시 분위기에도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은 거짓으로 부고를 낸 뒤 다시 결혼시켰습니다.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키기도 하였습니다.

 

3) 독립운동

1905년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조정의 고관이었던 이상설과 대한제국 외무부 교섭국장인 친동생 이시영 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 철회, 무효화운동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바로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조약체결에 가담한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 늑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었고, 고종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같은 해,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하여, 회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10년 12월, 우당을 포함한 6형제는 조선의 명성을 포기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이때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였습니다. 이회영 일가는 지린에 정착하여 경학사,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독립 운동을 위한 기반 닦기에 들어갔습니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나게 되어,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에게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였습니다.

 

우당은 독립후 건설될 사회는 국가간 민족자결의 원칙뿐 아니라 민족내부에서도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는 사회여야 한다고 결론지으며,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1924년 단재 신채호 등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했습니다. '조선혁명선언'으로 더 잘 알려진 단재의 '의열단선언'도 당시 우당과 단재 등의 토론을 토대로 집필된 것입니다.

 

1931년 만주사변후 우당은 중국인 동지 왕아초 등과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며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연맹 행동부는 상해 북역사건, 아모이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천진항의 일본 군수물자수송선 폭파사건, 천진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등 일련의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당은 다시 만주에 근거지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결심, 둘째형 석영과 극소수 동지들에게만 알린 채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향했습니다.그러나 그의 만주 밀행은 밀정에 의해 일본 경찰에 밀고되었고, 대련 수상서에 체포당했고 그곳에서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아 1932년 11월17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뒤 상해의 동지들이 밀정 색출에 나서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를 벌인 끝에 밀정이 다름아닌 연충렬(임시정부 요인 연병호의 조카이자 엄항섭의 처남)과 이규서(이석영의 둘째아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상해 부근 남상에서 처단되었습니다. 우당의 셋째아들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이규창이 밀정 처단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규창 역시 일본공사 암살을 기도해 해방될 때까지 13년간을 복역했습니다.

 

2. 교훈

서울 명동성당 정문 앞 골목 안쪽에 이회영 선생 6형제의 생가 터가 있습니다. 망명 당시 다른 재산을 비밀리 매각하고 떠났으나 6형제가 태어난 이 99칸 저택은 일본감시망에 드러날 우려로 처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독부에 그대로 접수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다섯째인 이시영 부통령에게 명동의 생가 터와 재산을 환원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이시영 선생이 '한번 민족에 바친 것이니 되받을 수 없다'며 사양했습니다. 생가 옆 길가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6형제 생가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당은 6형제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만석의 재산을 처분할때도, 독립운동을 할때도 앞장서서 나섰습니다.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우당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그의 삶을 간단히 나마 적어보았지만 치열하게 투쟁했던 삶에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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