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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 조지 패튼

by inniable 2023. 12. 15.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 조지 패튼

조지 스미스 패튼(George Smith Patton)은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고속 기동전으로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에서 독일까지 전선을 휩쓴 2차대전의 영웅입니다. 보급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패튼은 빠르게 진격했고 연합군 최초로 라인강을 넘어 독일을 점령한 장군이었습니다. 1970년 헐리우드 영화 패튼은 그의 2차대전 활약상을 그린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차

2차대전의 영웅 패튼

어린시절과 1차대전에서의 패튼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패튼

 

2차대전의 영웅 패튼

 

1970년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2차대전의 미국 조시 스미스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은 전차를 활용한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입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튼의 미 육군 제3군은 프랑스에서부터 독일까지 폭주기관차처럼 가는 곳 마다 독일군을 격파합니다.

패튼의 고속 기동전의 양상은 대게 이렇습니다. 선두에 서서 적을 마주하는 기갑부대는 적의 저항을 받게 되면 그대로 우회로를 찾거나 틈새를 찾아 원래 공격목표까지 그대로 돌파해 나갑니다. 뒤따라 오던 후속부대가 다시 그 적을 마주하며 싸우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적군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전선이 붕괴되어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다만, 후속부대는 패튼이 남겨놓은 적군을 하나씩 격파해야 했으며, 패튼의 기동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보급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패튼은 이러한 고속 기동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전선 시찰을 나가고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폈으며, 환경과 정보를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고속 기동전은 타이밍과 포지션이 중요했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매우 공을 들이는 장군이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인 몽고메리 장군과는 개와 고양이 사이로 유명했습니다.

 

 

패튼의 주력전차 M-48

 

 

 

 

어린시절과 1차대전에서의 패튼

조지 스미스 패튼(George Smith Patton)은 1885년 캘리포니아주 샌가브리엘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버지니아 출신인 그의 대대로 군인 집안 이었고 패튼의 할아버지 스미스 패튼은 남북전쟁 당시 기병대로 활약했었습니다. 패튼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1909년 West Point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15년 패튼은 멕시코 주둔 미군 사령관 존 J. 퍼싱(John J. Pershing)의 보좌관으로 멕시코의 혁명가인 판초 비야가 이끄는 군대에 맞서 기병대를 지휘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패튼은 퍼싱과 함께 유럽으로 가서 새로 창설된 미국 전차군단의 첫 번째 장교가 됩니다. 그는 리더십과 전차에 대한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고, 전차를 활용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패튼은 미국의 여러 기지에서 탱크와 기병 부대에서 복무했습니다. 2차대전 중 1940년 미국이 재무장을 시작했을 때 패튼은 대령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에서의 패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패튼은 제2기갑사단의 지휘권을 받았고 캘리포니아 사막에 훈련 센터를 조직했습니다.

1942년 후반 패튼은 2군단의 수장으로 북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처음 상륙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군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shall attack and attack until we are exhausted, and then we shall attack again.
우리는 공격하고, 지칠 때까지 공격하고, 그 다음에 다시 공격할 것입니다.

 

전투에 대한 패튼의 열정은 Old Blood and Guts(오래된 피와 용기)라는 화려한 별명을 얻게 하였고, 시디 부지드, 카세린 계곡 전투 등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미군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치욕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미군은 패튼 장군을 통해 공세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1943년 3월 엘 게타르 전투에서 나치군을 상대로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 달 후, 패튼은 미7군의 시칠리 침공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지휘권을 오마 브래들리 장군에게 넘겼습니다.

시칠리 상륙 작전은 영국 몽고메리 장군의 농간으로 주력부대가 아닌 조력부대의 위치에 서야 했지만, 오히려 패튼은 영국군을 따돌리고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패튼의 명성은 이탈리아 야전병원에서 PTSD에 시달리고 있는 군인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명성에 큰 타격을 입게됩니다. 그는 공개 사과를 해야 했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으로부터 날카로운 질책을 받으며 한직으로 쫒겨나게 됩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패튼

연합군 첩보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가상 작전인 포티튜드 작전을 실행합니다. 파 드 칼레와 가까운 위치의 도버에 가짜 사령부를 세우고 대량의 전차와 상륙정 등을 배치하여 실제인 것처럼 꾸입니다. 가상 작전을 위해 가짜 부대인 미 육군 제1집단군을 만들고 사령관을 패튼으로 임명합니다. 독일 정보부는 패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속임수라고 생각하게 되며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독일군 사령부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연합군은 D-Day(1944년 6월 6일)에 노르망디 해변에 실제로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제1군이 독일군 전선을 무너뜨린 후, 패튼의 육군 제3군은 코브라 작전을 실행하여 독일군을 휩쓸었습니다. 또 그해 말, 아르덴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좌절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45년 초, 패튼은 군대를 이끌고 연합군 최초로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진군하여 10,000마일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고 나치 군대를 궤멸시킵니다.

패튼은 반공주의자로 독일 항복 후 몇 달 동안 이루어진 독일에서의 러시아 공산당의 행태를 비판하며 논란의 대상이 되자 아이젠하워는 1945년 10월 그를 제3군 사령관에서 해임했습니다.

그해 12월 패튼은 독일 만하임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로 척수와 목 부상을 입었고, 12일 뒤 하이델베르그 병원에서 60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패튼의 회고록 War As I Knew It(내가 알았던 전쟁)은 1947년에 출판되었고, 1970년 조지 스캇(George C. Scott) 주연의 영화 패튼(한국에서는 패튼 대전차 군단으로 알려졌습니다)은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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