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사건과 간도참변
훈춘사건과 간도참변은 1920년대 활발했던 무장 독립투쟁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제국이 벌인 만행입니다. 일본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고 간도지방 진출을 위해 획책한 훈춘사건을 빌미로 일본군 2만명을 간도지방으로 출병시킵니다. 무장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오히려 패배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방의 민간 조선인을 학살하게 됩니다.
목차
훈춘사건과 일본군의 간도 진출
1920년 6월 봉도동 전투의 패배로 일본은 독립군의 말살을 계획합니다. 독립군의 활동지역이 간도지방이었고, 일본군의 간도진출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조작합니다. 훈춘사건은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제1차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 마적 300여명이 3시간에 걸쳐 훈춘 시가를 습격하여 약탈 및 방화하였습니다. 제2차 훈춘 사건은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본군에게 매수된 장강호 마적단이 훈춘을 다시 습격합니다. 마적단은 상가를 약탈하고 훈춘 일본영사관 분관에 불을 지른 후 오전 8시에 물러났습니다. 당시 일본측의 피해는 13명이 사망하였고, 31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외 중국인 71명과 조선인도 7명이 사망합니다.
일본군은 제2차 훈춘사건을 빌미로, 훈춘을 습격한 마적단에 불령선인과 러시아 과격파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적단이 단순한 마적단이 아니라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훈춘을 공격했으며,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과 연계한 정치적 세력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일본군의 군사활동의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1920년 10월 7일 일본은 제국신민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군의 간도 파견을 결정하였고, 간도 지방에 있는 독립군 소탕을 명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약 2만명의 일본군이 만주로 이동하였고 독립군을 공격합니다.
간도 참변
일본군의 독립군 소탕계획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독립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중이나 국경 지대로 이동하며 일본군을 괴롭혔습니다. 독립군을 계속 추격하던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 21일 ~ 26일)에서 독립군에게 패하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합니다. 이후 약 3 ~ 4개월 동안 수많은 조선인 마을이 불탔고, 식량과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습니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 거주하였던 조선인 전 주민이 살해당하는 등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에서 학살된 조선인들은 3,469명이었습니다. 이 외 확인되지 않은 수와 3 ~ 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추정하면 피해입은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은 연해주의 조선인에게도 같은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총산(청산리), 교회 겸 학교 및 가옥 수채가 소각되고 30명 살해됨. 그중 23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7명은 각자 집에서 타 죽음, 운통자, 교회 겸 학교가 불타고 80명이 사살됨...칸창암(장암동) 마을의 젊은이들과 한 조선인 가옥 앞에서 무리를 이루어 줄지어 심문하는 형식도 취하지 않고 사살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해당 가족 중에는 아버지와 아들 2명, 다른 가족 중에서는 2명의 형제와 그 자녀였고, 처형된 이는 모두 25명이었고, 사살 후 시체는 2곳에 포개져 잡초를 덮고 소각했다고 합니다..... "
W R 푸트 장로파 수석 선교사가 일본 도쿄의 올만 박사에게 보낸 서신(1920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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