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지 사기 또는 폰지게임
폰지 사기(Ponzi Scheme) 또는 폰지 게임(Ponzi Game)이라 불리는 사기 수법은 실제 아무런 이윤 창출 없이 나중에 투자한 투자자들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며, 1920년대 이탈리아 출신의 금융인 찰스 폰지(Charles Ponzi, 1882~ 1949)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찰스 폰지는 188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집배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대학 진학 후 부유층과 어울린 그는 유흥에 많은 돈을 쓰게 되었고, 가족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별다른 소득이 없던 그는 1907년 몬트리올로 가서 자로시 은행이라는 곳에 취직하게 됩니다.
1. 폰지 사기 수법 착안
자로시 은행은 예금 이자가 다른 은행의 2배였던 6%로 이자를 지급했고, 은행은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그런나 이 이자는 은행의 수익이 아니라 신규 가입자의 예금에서 돈을 빼서 이자를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동산 부실 대출로 재정위기에 처하자 은행은 망해버렸고, 자로시 은행장은 돈을 가지고 멕시코로 도망쳤습니다. 이 사건은 찰스 폰지가 망하기 전에 돈을 가지고 튀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기를 생각하게된 계기가 됩니다.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던 찰스 폰지는 몬트리올에서 수표를 위조하여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수표위조로 발각, 체포되어 3년간 감옥에 있게 됩니다. 1911년 석방후 미국으로 돌았갔지만 또, 이탈리아 사람들의 밀입국 사기혐의에 연루, 애틀란타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같은 교도소 수감자인 찰스 모스로부터도 사기 행각의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2. 사기의 구상
1919년 찰스 폰지 앞에 만국우편연합의 국제반신권(IRC)이 나타났습니다. 국제반신권은 우편 발송인이 수취인의 답신 요금을 면제할 수 있는 우표권으로,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한 국가라면 어디서든 우표로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구매한 반신권을 미국에서 달러로 바꾸면 차액이 발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국제반신권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찰스 폰지는 투자자를 모집하였습니다. 3개월만에 2배의 차익을 내주겠다고 약속한 그는 약 1,200달러 투자를 받게 됩니다.
3. 본격적인 사기행각
본격적인 사기행각을 위해 1920년 증권거래사를 세우게 됩니다. 첫달은 18명이 1,800달러를 맡겼습니다. 한달후 신규 투자자의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의 돈을 지급합니다. 그는 스쿨 스트리트 나일스 빌딩에 더 큰 사무실을 세웠습니다. 1920년 2월에서 3월 한달사이에 투자액은 5천달러에서 2만5천달러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폰지는 에이전트를 고용, 뉴잉글랜드 및 뉴저지주에서 새로운 투자자를 모집합니다. 1920년 5월 투자액은 42만달러, 6월에는 250만 달러, 7월 말에는 하루만에 100만 달러를 모집하게 됩니다.
폰지는 국제반신권을 돈으로 바꾸는 일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최초 18명의 투자자들이 이익을 보려면 국제 반신권 53,000장이 필요했고, 이후 15,000명의 투자자들이 이익을 보려면 타이타닉 규모의 배에 국제 반신권을 가득 채워 유럽에서 미국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4. 몰락
1919년 찰스 폰지가 사기를 시작할 당시 조셉 대니얼스(Joseph Daniels)라는 가구 회사 사원에게 230달러의 가구와 회사 설립 자금 200달러를 빌려 쓴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폰지가 유명해질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했고, 이익이 발생할 것이라 생각한 조셉 대니엘스는 "단순 대출이 아니라 자본을 제공한 사람이며, 폰지는 사업 파트너였다"고 주장하며 폰지에게 수익을 배분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송은 뉴스거리가 되었고, 돈을 회수하려는 투자자와 취재진이 몰려들었습니다. 폰지는 투자자들을 안심시켰으나, 법원은 조사를 위해 폰지의 회사에 영업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소송을 계기로 기자들은 이 사건을 자세히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 7월 Boston Post지가 폰지의 악행을 고발하였고, 폰지는 연방법원에 기소되어 우편 사기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됩니다. 1925년 연방법원에서 선고받은 형이 만기가 되어 풀려나자, 석방된 상태로 남은 재판을 진행하면서 플로리다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또, 플로리다 부동산 거품에 편승하여 또 다른 사기를 시도하다 적발되었으며, 도주하다 항구에서 붙잡혀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다시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의 사기로 인해 하노버 신탁 은행을 포함한 5개 이상의 은행이 도산하는 등 막대한 여파가 발생했으며, 총 투자손실은 약 2천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억 2,50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해자들은 1달러당 30센트도 안되는 금액을 돌려받았습니다.
1934년 출소후 이탈리아로 추방되었고, 배우자와는 1937년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사기 행각을 벌이곤 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자서전을 쓰기도 하였지만 남은 인생은 가난에 시달리다 1949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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