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르 크뤼게르
이바르 크뤼게르(Ivar Kreuger, 1880~1932)는 1920년대 스웨덴 경제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웨덴 칼마르 지역에서 작은 성냥 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크뤼게르는 스웨덴 왕립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20세에 도시공학 석사를 딴 것을 보면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 성냥왕(Match King) 크뤼게르
미국으로 건너가 철근콘크리트에 관련한 특허를 스웨덴과 독일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옵니다. 이 특허를 활용하여 건축회사를 설립, 성공가도를 달립니다. 당시의 올림픽 경기장, 스톡홀름 시청, 스톡홀름 시내 고급백화점인 엔코 등은 지금까지도 도시의 이정표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건설업을 통해 모은 자본금으로 투자사를 설립하였으며, 아버지의 성냥공장을 중심으로 여러 성냥공장을 인수후 스웨덴 내 성냥 생산과 공급의 독점권을 따냅니다. 그리고 북유럽 시장과 독일의 성냥 생산과 판매의 독점권을 얻게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성냥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품입니다. 난방, 요리, 조명 등 성냥은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성냥은 황으로 만들어 색이 노랗고 불이 너무 잘 붙어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습니다. 크뤼게르는 점화부분을 개량해 가연성을 낮추고, 성냥갑 바깥에 거친 점화부분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색 성냥입니다. '안전한 성냥'임을 내세워 홍보했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크뤼게르 성냥은 세계시장을 휩쓸었습니다. 이때 붙은 별명이 성냥왕(Match King)입니다.
2. 금융사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계 성냥 시장의 75%를 점유한 그는 그의 모국인 스웨덴과 미국의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지(SCA), 탄광, 금광(볼리덴), 철도, 은행(스칸디나비아신용대출회사), 언론사에 이르기까지 1931년 당시 크뤼게르가 손을 댄 기업은 무려 2백여 곳에 달했습니다. 특히 그가 보유한 채굴권은 세계 철광시장의 50%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의 호소력 짙은 말투는 투자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였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려 자신의 회사를 독과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당시 3억 크로나, 지금의 가치로 한화 12조원에 이릅니다.
당시 그의 금융 시장에 대한 이해와 아이디어는 오늘날 투자은행의 금융공학의 시초입니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자신이 소유한 기업에 투자를 하고, 회사 가치가 오르면 그것을 담보로 또 돈을 빌려 다른 회사에 투자하여 재산을 불립니다.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경영권 확보를 위해 주식의 등급을 나누어 의결권에 가중치를 더했습니다.
독점으로 운영하는 성냥 공장을 미끼로 고배당을 약속하는 장기 무담보 사채를 발행, 자금을 쓸어 담았습니다.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주식과 채권의 중간 개념인 주식예탁증권을 발급해 투자금을 모았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개념으로 해외투자가 막혔던 돈 많은 미국 투자자와 해외 기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오늘날 미국 예탁 증권(ADR)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JP모건이 초기에 이 방법으로 해외투자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달러화 평가절하에 대비 네덜란드 길더와 미국 달러 두 종류로 지급수단을 요청할 수 있도록 조정했습니다.
3. 분식회계와 몰락
그는 소유한 수많은 기업간 거래를 회계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임의로 처분하는 등 부외 거래(off balance sheet financing)를 통해 규제를 회피하였습니다. 투명하지 않은 자금 흐름과 무분별한 투자는 부실 경영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처리는 경기가 활황일 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불황일 때 입니다. 1929년 월가의 주가 대폭락과 경제공황으로 투자사이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 그가 자기고 있던 에릭손 주식을 미국의 전화통신기 제조회사인 ITT에 매각하였습니다. 1932년 ITT는 크뤼게르가 주식을 팔 당시 고의로 에릭손의 자산상태를 부풀려 놓은 것을 발견하고 계약을 무효로 하고, 판매 대금 1천 1백만 달러를 환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공황이 진행중이라 투자자도 모집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환급요구가 있고 몇 주 후 1932년 3월, 크뤼게르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크뤼게르의 죽음으로 그가 소유한 기업은 줄줄히 도산했고, 그에게 투자했던 스웨덴과 미국 투자자들이 들고 있던 채권은 휴지가 되었습니다. 크뤼게르 크래시(The kreuger Crash)라 불리는 사건은 1933년~34년 사이 미국의 금융 규제 입법 실행의 계기가 됩니다.
스웨덴은 혼란에 빠졌고, 당시 사민당(Sveriges Socialdemokratiska Arbetareparti, 사회민주노동자당) 대표인 페르 알빈 한손은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자본의 규제와 사회 안전망을 위한 복지정책을 내놓아 정권을 잡았고, 이후 44년간 스웨덴은 사민당이 집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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