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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및 기업

로스차일드 가문

by inniable 2023. 4. 7.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가문이 떠오르게 된 사건들과 비밀스러운 이미지로 각종 음모론에서는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지목받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미국 내에서 정치, 금융 등 분야에서 거대한 영향력이 있고, 유대인들과 유대자본을 많이 쥐고 있으며,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근대 초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어 "붉은 방패"를 뜻하는 'zum rothen Schild'를 영어식 발음으로 바꾼 것입니다. "붉은 방패"는 그들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며 Izaak Elchanan Rothschild가 1577년 로스차일드 특유의 집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들은 환전, 고철 매매 등 잡다한 일들을 하던 천민 출신이었지만, 19세기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며, 현재까지도 많은 부을 소유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된 사업 분야는 금융업이고, 그외 석유, 금, 레저, 와인, 광산, 호텔 등 각종 분야에서 활동합니다.

 

1. 전성기의 시작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는 18세기 말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그곳에서 소규모 무역업과 전당포 등으로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영세한 전당포 주인으로 남을 생각이 없던 마이어는 골동품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고, 환전상을 하게되면서 헤센 가문의 종주이자 헤센카셀 방백국의 빌헬름 9세와 거래하게 되면서 금융업자가 됩니다. 마이어의 일솜씨를 마음에 들어한 빌헬름 9세는 그에게 장부관리 업무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입성하자 빌헬름 9세는 국외로 도피했습니다. 마이어의 재산은 프랑스에게 몰수당했지만, 빌헬름 9세의 재산은 철저히 숨겨놓았고, 훗날 복귀한 빌헬름 9세는 자신의 재산을 고스란히 보관해둔 마이어의 관리 능력과 진실에 감동하여 가문의 재산관리자로 임명하게 됩니다.

 

빌헬름 9세은 마이어에게 3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거금을 주고 운용을 맡깁니다. 이 돈을 기반으로 마이어는 주식과 채권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습니다.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가난한 전당포 주인에서 거부로 성장한 그는 금융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다섯 아들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로 보내 최초의 국제 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아들들은 각 나라의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 수지맞는 거래를 제공해 연줄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연줄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왕, 전쟁, 유럽 최초의 철도 등에 자금을 대면서 명성을 얻게됩니다. 결국 로스차일드 식구들은 힘을 모아 유럽 전역에 걸쳐 견고하고 효율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동 자금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산업혁명에 자금을 공급했고 유럽 자금시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후 마이어가 죽고 셋째 아들 네이선이 로스차일드가의 수장이 되는데 그때부터 로스차일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2. 워털루 전투 당시 영국 국채 투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 국채투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1815년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는 재기를 노리는 나폴레옹과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의 워털루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런던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영국이 패한다면 영국의 국채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차일드의 스파이들은 즉시 정보를 모아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정보를 받은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즉시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덩달아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의 투매 열풍 속에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트릭이었고 국채가 휴지 조각으로 변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영국이 승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국채 가격은 급등했다.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의 차익을 챙겼고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로스차일드를 연구했던 하버드 대학의 니얼 퍼거슨은 이 일화에 대해 반론하고 있습니다. 영국 국채에 투자한 사실을 맞지만, 정보를 교란하여 수익을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여 이득을 취했고,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후에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고 잘못 예상하였습니다.

 

이에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엄청난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을 만큼의 손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네이선은 전후 영국 정부 차입이 감소해서 국채가 폭등할 것이라 예상하였고, 영국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는데, 이 예상은 다행히 들어맞아 채권 가격이 폭등하여, 40% 쯤 상승한 고점에서 채권을 매각해서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를 넘는 거액을 벌어 위기를 금을 대량으로 매입한 손실을 메꾸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3. 잉글랜드 은행 구제

네이선은 워털루 전투를 바탕으로 영국의 최고 은행가가 되었고 1826년에는 영국 중앙은행이었던 잉글랜드 은행을 지급불능 위험에서 구제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영국 회사들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 투자했는데 1년 후 라틴 국가들이 지급불능을 선언하면서 돈을 빌려준 중앙은행이 망하게 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네이선은 은행이 망하기 직전에 형제를 통해 프랑스로부터 긴급히 자금을 이전해 은행을 구했습니다.

 

4. 가문의 분파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가문이 수장이었고, 그의 다섯 아들을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나폴리에 보내 국제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영국 로스차일드의 규모가 커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대가 끊기며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는 가장 먼저 몰락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지부도 교황령, 나폴리, 토스카나의 군주들과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명문가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의 주요고객인 귀족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고, 가문의 대가 끊기며 1920년대 이탈리아에서 완전 철수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지부는 1820년대 은행을 만들었고, 철도 사업 등으로 오스트리아 명문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38년 오스트리아 연방국이 나치독일에 흡수합병되면서 로스차일드 오스트리아 지부의 재산이 강제 몰수 되었습니다. 가족들 상당수는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1999년에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1억달러 상당의 미술품을 돌려받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 지부(로쉴드)는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막내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세웠습니다. 금융사업 뿐만 아니라 와인사업도 하면서 국제적인 거부가 되었습니다. 1982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이끄는 정부가 로쉴드 은행을 국유화 하면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지만, 디비드 드 로쉴드가 세명의 직원과 100만 달러의 자본으로 새로운 로스차일드 은행을 다시 세웠습니다.

 

영국의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가 몰락하면서 본가의 역할을 하게됩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셋째인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맨체스터에서 직물사업으로 시작했으며, 자본을 확장하여 은행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영국과 나폴레옹이 전쟁을 하는 동안, 웰링턴 공작에게 꾸준히 군자금을 지원했고 영국의 최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영국 수에즈운하 지분 매입도 지원하는 등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5. 이후

쑹홍빙이 쓴 책 '화폐전쟁'에 따르면 1850년을 전후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총 60억 달러의 자금을 축적했으며, 수익률을 6%로 계산하면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 가족의 자산은 최소한 50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금융 감독 시스템은 전례 없이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록펠러 가문이 쪼개지면서 과거의 영향을 상실하였듯 로스차일드 가문도 긴 세월동안 대규모 전쟁과 재산 분할 등으로 그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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