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파르딤 유대인 : 알람브라 칙령까지 탄압의 역사 02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스페인의 기독교 국가들은 1085년부터 1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유대인의 능력과 부를 활용하였고, 우대정책을 폈습니다. 알폰소 6세의 우대정책에 감동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를 위해 스스로 알폰소 6세를 위한 군인이 되었고, 알폰소 8세는 유대인 여인을 열렬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사라지지 않고 이들 왕이 죽자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또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알폰소 6세와 알폰소 8세, 그리고 유대인들
1040년경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왕국의 페르난도 1세와 레온 국왕 알폰소 5세의 딸 산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알폰소 6세는 1085년경 톨레도를 다시 탈환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유능하고 부유하다는 것에 착안, 여러 혜택을 유대인들에게 부여했습니다. 유대인들을 기독교인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주었고, 귀족들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 역시 부여해주었습니다. 다른 귀족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이러한 조치에 감동 받은 유대인들은 알폰소 6세를 자발적으로 섬겼으며, 이러한 섬김으로 알폰소의 군대에는 4만명의 유대인 병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알폰소의 유대인 우대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국의 세자인 산초가 우클레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분노한 군중은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알폰소 6세는 혼란을 야기한 폭도들을 처벌하려 했으나 그 전에 죽어버렸습니다.
알폰소 6세 사후, 알폰소 7세는 레온, 톨레도, 산티아고의 왕이자 스페인 황제를 자처했고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며, 반유대적 정책을 실시했으나 왕국의 필요에 의해 어쩔수 없이 유대인들을 기용합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금을 징수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유대인 유다 벤 요세프 이븐 에즈라를 재상으로 등용했습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1166 ~1214)는 유대인들에게 오르, 셀로리코, 그리고 마요르카를 맡겼으며, 나바라 왕국의 현자 산초 왕은 유대인들에게 에스텔라, 후네스, 무라뇽을 맡겼습니다.
특히 알폰소 8세는 라헬이라는 유대인 여인을 깊이 사랑했는데, 그가 유대인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라르코 전투에서 알폰소 8세가 이슬람에 패배하였을 때, 사람들은 왕이 유대인 여자에 빠져있어서 패배했다는 소문을 냈고,결국 귀족들은 라헬과 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합니다.
그러나 알라르코 전투 이후 카스티야 왕국의 운명은 매우 위태로웠고, 유대인을 차별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전쟁에서 활약하게 되는데, 부유한 톨레도의 유대인들은 알폰소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다시 시련의 시작
1214년, 알폰소 8세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치하에서 나름 행복하게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페르난도 3세, 하이메 1세 등은 유대인 억압 정책을 실시했고, 가톨릭 교회도 유대인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스티야 왕국은 유대인의 노란색 벳지 착용을 의무화했고,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 것을 금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과 같이 사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목욕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더불어 유대인은 기독교인 간호사나 하인을 둘 수 없었고, 기독교인은 유대인이 판매하는 의약품을 구입할 수 없게 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불만은 계속 커져갔고, 심지어 1366년에는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또 발생 했습니다.
유대인의 끈질긴 생명력
하지만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유능한 민족으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금융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분야였습니다. 귀족과 왕 모두 급전이 필요할 때에는 결국 유대인들한테 부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특별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세원인 유대인을 굳이 말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366년에 왕위에 오른 엔리케 2세는 스스로 반유대 정책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기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사무엘 아브라바넬과 같은 부유한 유대인을 기용하여 재정고문을 맡기고, 요세프 피촌 데 세비야를 기용하여 세금 거두는 일을 맡깁니다. 하지만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엔리케 2세가 죽자 귀족과 성직자들, 그리고 엔리케 2세의 아들이 요세프를 모함하였고, 처형시켰습니다. 유대인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전 왕국에 반유대 정책 및 공포 정책을 확산시켰고, 유대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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