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파르딤 유대인 : 알람브라 칙령까지 탄압의 역사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현재 스페인지역에는 기원전후로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세파르딤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Baruch Spinoza (스피노자, 철학가), David Ricardo (리카도, 비교우위 경제학), Benjamin Disraeli(벤자민 디즈라엘리, 대영제국 수상) 등은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후손입니다.우리에게는 세파르딤 유대인이 낯설지만 중세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파르딤(Sephardim) 유대인의 기원
세파르딤 유대인은 지금의 스페인에 기반을 두었던 유대인을 말합니다. 이들이 언제 스페인에 정착했는지 확실한 학설은 없지만, 로마 티투스 황제 시대에 대거 이주했다고도 하고, 바빌론 유수 때부터 정착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로마시대 스페인에 정착했던 유대인은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농업에도 종사했고, 수공업에도 종사했습니다. 현지 주민들과도 문제 없이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로마제국의 국교가 기독교로 정해지자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서고트족의 에스파냐 점령, 서고트 왕국 시대의 유대인
에스파냐를 점령한 서고트족(게르만족의 분파)은 처음에는 종교에 비교적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아리안 주의)를 믿고 있었지만,로마제국 가톨릭에 대해서만 적대적이었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587년 리카르트 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유대인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유대인의 강제 개종을 시도했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부부간의 자녀 또한 반드시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의 공직 참여도 금지했고, 기독교인과 결혼도 금지했습니다.
리카르트 왕의 이러한 행보는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고트족 중에서도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들도 많았고, 이들이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유대인을 보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지제부트 왕(612-620)이 등극하며 다시 유대인의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제부트 왕은 반유대주의를 왕국의 공식 정책으로 삼았고 613년에는 왕국의 모든 유대인에게 개종 아니면 추방을 선택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 또는 갈리아 지방으로 망명했고, 9만 명의 유대인은 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개종한 유대인들은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를 위해 비밀리에 유대교를 섬겼습니다.
621년에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스윈틸라 왕이 새로 권좌에 올랐습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은 다시 유대교로 복귀하였고 일부 망명한 유대인들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633년 새로운 왕이 등극하자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렸고, 반유대 정책이 다시 도입됩니다. 제5차부터 제8차 공의회에서 모두 유대인들은 강제 개종 대상 또는 추방 대상이 되었습니다.
제12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였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농업에서 자취를 감추도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유대 정책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제16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역시 이러한 조치를 재확인하였습니다
100년 동안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로 대거 떠났습니다.
이슬람에 의한 에스파냐 정복, 유대인의 해방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스페인을 정복하자 남아있던 유대인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합니다. 무슬림 역사자료와 기독교 역사자료 모두 유대인이 이슬람 정복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슬람 정복자들은 코르도바 등 일부 도시들을 유대인들에게 맡기기도 했습니다.
이슬람 정복자들이 유대인들을 동등하게 대우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은 고트족 치하에서 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마야드 왕조가 공고해지고 유대인의 삶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다른 지역 유대인들도 스페인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 뿐만 아니라 모로코와 바빌론(이라크 지역)에서도 모여 들었고, 스페인 유대인 공동체는 범유대공동체의 핵심이 되었으며, 히브리 철학과 문학, 과학이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곳에서 온 유대인들을 흡수하면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많은 아랍어로 된 그리스 고전을 다시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로 번역하고 또는 히브리어로도 번역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황금기, 알-안달루스
유대인들이 황금기를 맞이한 시대는 코르도바의 무슬림 왕국 시대입니다. 황금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코르도바의 칼리프 압드 알-라만 3세의 궁중고문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있습니다. 유대인이었지만 궁중 의사 뿐만 아니라 조세, 해외무역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문학을 후원하였고, 많은 유대인들이 코르도바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 때 많은 히브리 문학이 출간되고, 히브리어와 문자를 다시 정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출간된 히브리 문학은 종교, 자연과학, 수학, 천문학, 음악, 정치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 프랑스와 독일의 유대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히브리어 사전이 집필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왕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 헬레나 공주에게도 서신을 통해 비잔틴 제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알-안달루스의 유대인과 같이 자비롭게 다뤄달라고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라나다 대학살
9세기부터 11세기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출세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사무엘 이븐 나그렐라(993-1056)이라는 사람으로그라나다 왕국의 재상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슬람 왕국 역사에서 군대를 지휘한 유대인 지도자였고, 그라나다 왕국의 국정을 총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탈무드 개론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출세는 많은 무슬림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사무엘이 죽고 그의 아들 요셉 이븐 나그렐라가 재상으로 취임하자, 화가난 무슬림들은 왕궁을 포위하고 쳐들어가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4,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1066년 그라나다 대학살이라는 불리는 이 사건은 이슬람 왕국의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을 알리는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던 카스티야, 레옹, 아라투스, 아라곤 등 기독교 왕국은 무슬림 제국에게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슬람 도시들이 하나씩 넘어가게 되었고, 1085년에는 대도시 톨레도 역시 기독교 왕국의 손에 넘어갑니다.
이후 알-안달루스 왕국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이들은 왕국이 약화된 것은 이슬람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타종교는 모두 개종시키거나, 추방 혹은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1172년에는 이슬람 왕국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추방령이 내려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주변의 기독교 왕국으로 피난했습니다. 마침 당시 유럽의 기독교 왕국들은 고트족과 달리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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